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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조선 말 청국조계지(租界地)와 차이나타운

by Rail-road 2024.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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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고종 20년(1883) 1월 인천에서 개항이 이루어졌다.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의 결과 일본에 의해 1876년 부산에서 첫 개항이 이루어졌으며, 1880년 원산에 이어 인천의 제물포가 세 번째 개항장으로 지정된 것이다. 인천의 개항으로 조선시대 대외 교역의 중심지였던 부산항의 비중이 점차 줄어들었으며, 더불어 강화도의 위상도 변하면서 인천이 새로운 요충지로 떠오르게 되었다. 사실 조선 정부는 인천의 개항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처음부터 강경한 거부 자세로 일관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훗날 인천이 '조선 개항의 상징'이라 불려질 정도로, 수도에서 아주 가까운 해안의 요충지인 인천을 개항하게 되면 서울의 시장이 피폐해지고 민생이 어려워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끈질긴 일본 측의 요구와 러시아 견제를 위해 일본과 친밀할 필요가 있다는 김홍집의 의견을 받아들여 끝내 인천도 개항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김홍집은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개화 정책을 추진했던 인물로 갑오개혁을 주도하기도 했다)

  
청국 조계의 설치

  '조계(租界)지'란 통상적으로 개항장 근처 외국인들이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설정한 지역을 뜻하는데, 일본이 조선 땅 내에 조계지를 설정하고 경제적 요지를 먼저 확보해 나가자 마음이 급해진 청나라도 조선에 대한 적극적 간섭과 영향력 확대를 도모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임오군란(1882)' 진압을 위한 군사 파견이었다. 서울에 들어온 청나라 군은 대원군 정권과 일본 측을 중재하는 듯 한 태도를 보이면서 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해 가는 한편, 군대를 몰아 서울 시내와 궁궐을 장악했다. 이어 그 해 10월에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여 강화도조약 이후 증가되고 있는 일본의 대외무역 독점과 영향력을 저지하고자 한다.

  고종 20년(1883) 말에 청나라는 관리자를 두어 영사 사무를 관장하도록 하였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청인들이 인천에 내항하기 시작했다. 1884년에는 청인들이 옛 세관의 뒤편에 집을 짓고 식료품, 잡화류의 수입과 해산물류의 본국 수출에 종사하였고, 외국 선박이 입항하였을 때 식료품과 식수를 공급하였다. 청나라 상인들의 수가 점차 늘어나면서 고종 21년(1884)에 이르러 「인천구화상지계장정」이 조인되었으며, 정식으로 청 전관조계가 설정되었다. 조계는 토지 취득방식에 따라 전관조계(Concession)와 거류지(Settlement)로 구분되는데, 전관조계는 필요한 토지를 외국 정부가 한꺼번에 임대하는 것을 말하며, 거류지는 외국인이 각자 토지소유자와 직접적인 절충을 통하여 임대하는 방식이다.

 

  청 전관조계는 해관 서북지역, 오늘날 인천 선린동 일대 구릉지대에 위치하였으며, 면적은 약 5,000평 정도의 규모였다. 장정의 내용에는 조계가 다 찼을 시 확장할 수 있도록 하고 청인들이 각국 공동조계 내에 거주할 수 있도록 하는 권리도 보장되었다. 조계지 내의 토지는 상·중·하 3등급으로 구분하여 바다 쪽으로 근접한 곳을 상등지로 하고, 등급에 따라 그 값을 다르게 정한 후 경매법으로 청상인에게 불하하여 세를 내고 차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갑신정변(고종 21년, 1884) 후 일본의 입지가 상대적으로 약화되면서 청국의 정치, 경제적 영향력이 확대되었으며, 이에 따라 청나라의 이주자들이 급증하여 당초에 설정된 조계지가 결국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청은 지계장정의 규정에 따라 한국인이 거주하는 삼리채에 새로운 조계를 확정하려 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1894-1895)의 패배로 인천지역 청인들의 상권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고 청 전관조계 역시 매우 위축되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양국군의 충돌이 심해지자 매편 수 백 명씩 인천을 떠나 본국으로 철수하였고, 전쟁 발발 바로 직전에는 인천주재 청 이사를 비롯 그 막료들 또한 아무런 통고 없이 귀국하였다. 당시 인천 잔류 청인들은 200여 명에 불과하게 되었다.

 

청국 조계의 철폐와 차이나타운

  광무 3년(1899)에 다시 조·청통상조약이 체결되고 인천 영사가 파견되면서 신조계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삼리채의 청 전관조계는 신조계지로서의 면모를 갖추지 못하고 대부분 채마밭으로 이용되었다. 러일전쟁(1904~1905) 후 일본이 한국에 대한 침략전쟁을 노골화시키면서 청조계는 다시 한번 변화를 겪게 된다. 1910년 8월, 한일합병조약에 따라 일본이 한국을 완전히 강점하게 되면서 조계의 존폐문제가 제기되었고, 1913년에는 조선총독부와 주한청국영사가 「재조선청국거류지폐지협정」을 체결하여 인천을 비롯한 부산·원산 3항의 청 전관조계를 철폐하였다. 이로써 1883년 개항과 더불어 설치되었던 청국 조계는 1914년 4월 1일을 기하여 완전히 폐지되었으며 인천부 관할 행정구역으로 편입되었다.

  당시의 중국인들이 살던 지계는 오늘날 청관거리라고 불리는 차이나타운(선린동·북성 일대)으로 지금은 제3세대라고 할 수 있는 화교들이 저잣거리를 중심으로 음식점, 잡화점 등을 차려놓고 있다. 1920년대부터 6·25 전쟁 전까지는 청요리로 명성을 얻었는데 공화춘, 중화루, 동흥루 등이 전국적으로 유명하였다. 한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각종 제도적 제한으로 화교들이 떠나는 등 차이나타운의 화교사회가 위축되었으나 한중수교(1992)의 영향으로 다시 활기를 되찾아 갔으며, 현재와 같은 차이나타운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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