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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조선의 비운의 왕, 단종의 복권과정

by Rail-road 2024.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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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비운의 왕, 단종

  조선의 역대 왕들 중, 단종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 '비운의 왕'일 것이다. 선왕이었던 문종이 죽은 뒤, 12살의 어린 나이에 국왕으로 등극하여 짧은 재위기간 동안 많은 수난을 겪었으며, 폐위 후에도 자신을 둘러싼 여러 복위 운동에 직간접적으로 휘말려 결국 17살이 되던 해 비운의 죽음을 당했다. 왕으로서 시호도 없이 사후 '노산군'이란 이름으로 20여 년을 보냈으며, 왕릉도 수도 한양에서 아주 먼 지금의 강원도 영월 땅에 묻혀 있다.

 

 

단종의 생애

  단종의 이름은 '홍위(弘暐)'이며, 어머니는 현덕왕후 권 씨로 1441년(세종 23)에 당시 왕세자였던 문종과 세자빈 권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자빈 권 씨는 단종을 나은 지 3일 만에 죽었다.) 단종은 여덟 살이 되던 1448(세종 30)에 '세손'에 책봉된다. 1450,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하자 단종은 세손에서 '세자'로 책봉된다. 하지만 문종의 짧은 재위기간으로 단종은 문종 즉위 2 3개월 만에 조선 제6대 왕으로 등극한다. 이때 나이 12세였다.

 

  문종은 자신이 병약하고 세자가 나이 어린것을 걱정하여 황보인, 김종서 등에게 보필을 부탁하였으며, 집현전의 학사인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에게도 단종을 부탁하는 유언을 남겼다. 그런데 1453년 그를 보필하던 황보인, 김종서 등이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제거당하면서 조정의 모든 권력을 수양대군이 장악하였는데, 사실상 단종은 단지 이름뿐인 왕이 되어버렸다. 1455년 단종을 보필하는 중신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던 한명회, 권람 등이 강요하여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단종은 '상왕(上王)'이 된다.

 

  1456년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이른바 '사육신(死六臣)'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모두 처형된 후 1457년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 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 그런데 수양대군의 동생이며 노산군의 숙부인 '금성대군'이 다시 경상도 순흥에서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사사되자 노산군에서 다시 강등이 되어 '서인(庶人)'이 되었으며, 결국 1457(세조 3) 10 24일에 영월에서 죽었다. (야사에서는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들고 왔으나, 차마 전하지 못하자 단종이 스스로 목을 매고는 줄을 창밖으로 빼내 당기게 했다고 한다.)

 

 

 

 단종의 복권 과정

  세조 즉위 당시 많은 유생들은 세조의 즉위를 부당하게 생각하여 낙향을 하거나 은둔하여 지내게 된다. '생육신(生六臣 )'의 경우가 대표적인 경우라 볼 수 있다. 지방으로 낙향한 유생들은 훗날 '사림'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이들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던 것이 바로 연산군 폐위인 '중종반정'에 있다. 중종의 즉위 이후 이들 사림의 등용이 대거 이루어졌고 사림은 유교 정신이념을 준수하는 조선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다만, 이때도 노산군의 복위를 말하는 것은 세조의 후손인 현 왕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일이기에 공식적인 언급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연산군의 폐륜적 행위가 도가 지나치고 그가 폐위됨에 따라 이제는 연산군에 관한 모든 것을 부정하게 되었고, 이후 세력을 형성한 사림에 의해 단종 복권의 움직임이 서서히 진행될 수 있었다.

 

  김종직이라는 인물은조의제문이라는 조문을 집필하였는데, 이후 이는 세조의 왕위찬탈을 빗대었다 하여 이미 죽었던 김종직을 부관참시하는 '무오사화'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선조 때에는 강원도 관찰사로 있던 정철이 노산군묘의 석물을 세울 것에 관해 건의하기는 하지만, 그 복권에 대한 공감대는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노산군은 어떻게 복권되어 단종이 되었는가? 적극적인 단종 복권의 목소리는 조선 후기 현종 때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송시열이 현종에게 노산군의 시신을 수습했던 '엄홍도'의 절의를 이야기한 부분은, 오히려 당대에는 숨어 살아야 했던 처지인 엄홍도가 후대에 와서 집권세력의 거두에 의하여 절의를 지킨 인물로 칭송되니, 이는 노산군에 대한 시각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노산군의 복권이 본격 논의되는 건 숙종 즉위 이후다. 하지만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단종과 대척점에 있는 건 바로 세조였고, 이후의 왕들은 모두 세조의 후손이기 때문이었다. 노산군과 그 신하들의 복권은 쉽게 넘어갈 수도 없었으며 자칫하다가는 현 왕실의 정통성에 일대 타격을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노산군의 복권을 추진한다. 사육신의 억울함을 알리는 상소도 올라오고 사육신의 복권을 논하면서, 우선 첫 단계로 노산군을 '노산대군'으로 한 단계 올려준다. 그리고 그 무덤도 개축하고 1691 (숙종 17) 사육신과 노산대군의 묘에 제사를 지내게 하더니, 마침내는 사육신을 복권시킨다. 

 

  숙종은 사육신의 복권을 세조를 위한 것이라면서 왕실의 정통성 훼손을 절묘하게 피해 간다. 1698년(숙종 24)에는 현감 신규가 노산대군에게 왕호를 내릴 것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린다. 역시 왕실의 정통성과 직결되는 문제라 여기기에는 반발도 뒤따랐지만, 마침내 그해 노산대군은 왕으로 복권되었으니, 그 시호는 순정 안장 경순 대왕이요, 묘호는 단종이었다. 단종 사후 근근이 생계를 꾸리다 세상을 떠난 그 부인 역시 당연히 왕후로 복권되어 정순이라 하였으니 이제 단종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국왕 자리를 되찾은 것이었다.

 

  굴곡의 역사를 산 단종의 짧은 생애. 단종은 어린 나이로 국왕에 올라 비록 당시 권력싸움에서 밀려났지만 그는 당대 여러 충신들의 마음속에, 그리고 후대 사람들의 마음속에 계속 임금으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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