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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6-7세기 고구려 벽화고분-사신(四神)도

by Rail-road 2024.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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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세기 고구려 고분벽화의 주제는 거의 대부분이 '사신(四神)도'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주제와 표현 방식에 있어서 많이 영향을 주었던 것은 이른바 '남북조' 양식이라 불리는 중국 남북조시대 때이다‘사신의 시대’로 불려질 만한 이 흐름에서도, 앞서 이야기했듯이 고구려는 그 수용에 있어 선택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평양권 고분벽화의 사신도

  우선 평양권 지역에 속한 진파리 1호분의 사신도를 살펴보면 비록 남북조 양식으로 표현된 수목과 연봉오리 사이에 현무가 자리 잡았지만, 중국에서 등장하는 사신은 일반적으로 도교 계통 선인의 종속적인 존재로 표현되는 것과는 달리,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사신이 널방 각 벽면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또한 '강서대묘'와 '강서중묘'의 벽화는 남북조 벽화 양식이 어떻게 수용되고어떻게 고구려 나름의 회화 양식을 만들어 나갔는지를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인데우선 그 특징은 진파리의 사신도와는 달리 사신이 아무런 배경 없이 벽면에 그려진다는 것이다이는 무배경에 가까운 벽면과 사실감 있는 사신 표현이 상상적 동물인 사신을 실제 존재하는 동물처럼 느껴지게 하기도 한다이는 역시 같은 시기 중국의 남북조의 벽화 미술뿐 아니라 수, 당대까지 이어지는 고분벽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표현과 효과이다현무도(강서대묘 널방 안벽 벽화)에서도 이와 같은 표현을 찾아볼 수 있는데 비록 대상이 지닌 입체감이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못하는 등 당대 화법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지만오히려 그러한 입체감 묘사에 주력해 우주적 신수(神獸)가 자아내야 할 강한 기운을 표현하는 데는 다소 한계가 있는 듯이 보이는 중국의 현무도와는 많이 비교되는 모습이다.

 

  고구려의 독자적인 사신도 표현 방식과 더불어 눈여겨 볼만한 것이 바로 이 시기 산수도(山水圖)의 발전이다기존 배경으로만 그려지고 표현에 있어서도 비현실적으로 그려졌던 산수도가제한적이지만 부피감을 나타내고 또한 산의 원근감을 알 수 있게 비교적 정교하게 묘사되어 주작도(강서대묘및 현무도(강서중묘)의 배경으로 그려지면서 벽화 속에 공간감을 부여해주고 있다또한 이 시기의 산수도는 벽화에서 하나의 독립된 회화 주제가 될 조짐을 보여주고 있다.

 

 집안권 고분벽화의 사신도

  집안에서 발견된 6-7세기의 사신계열 벽화고분은 통구사신총오회분 4호묘와 오회분 5호묘 등 3기가 있다이 중 특히 눈여겨 볼만한 것은 통구사신총 벽화의 널방 벽 사신도의 배경에서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구름들이다이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유행하던 남북조 미술의 한 흐름이었다그러나 반면에 이 남북조 양식의 가장 특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인동연꽃류와 가늘고 긴 줄기를 지닌 수목이 벽화에는 보이지 않고 있으며 이것은 곧 고구려가 수용과정에서 선택적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회분 4호묘와 오회분 5호묘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으로는 사신과 그 배경을 이루는 연속변형귀갑문귀갑문 내의 장식 요소들이다이런 화려한 배경 그림은 오히려 사신도와 같은 종류의 벽화가 지녀야 할 공간감을 약화시킴으로써신수로서 사신이 지녀야 할 힘과 운동력을 떨어뜨리고 있다이는 사신의 배경 묘사를 오히려 가능한 절제시켜 공간감의 느낌을 확보한 평양권의 고분벽화와의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연속변형귀갑문은 역시 6세기 고구려의 문화 교류특히 미술 양식에 있어서 주목되는 회화적 제재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이는 또한 집안 지역이 지니고 있던 문화 전통 및 문화 교류가 평양 지역과는 차별성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유의미한 자료이기도 하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전개과정은 외래문화요소의 수용과 소화재창조 과정이기도 하다.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6-7세기 전반에 나타난 이러한 사신도의 흐름 속 국가별 차이점은 당시 하나의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던 고구려의 문화적 전통 속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비록 특정 시기 그리고 사신도의 표현 방식에서의 부분적인 측면밖에 다루지 못하여 그 깊이 까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사신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던 오행신앙(五行信仰)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점그리고 그 문화가 고분벽화라는 회화 양식으로 재탄생했다는 것마지막으로 국가적(또는 민족적)인 사상과 종교적 신념체계에 따라 그 표현 방식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을 토대로 이해한다면 고구려의 고분벽화의 문화를 알아가는 데 있어서 그전보다 한 발짝 더 다가선 것이라 할 수 있다.

  

벽화를 통해 본 고구려의 대외 관계

  이처럼 동아시아의 장의미술 발달 과정 속에서 그 흐름을 같이 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발전을 한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그 영향을 중국에서 받았듯이, 고구려 역시 백제와 신라뿐만이 아니라 나아가 바다 건너 왜(일본)까지 영향을 주었다백제의 고분벽화는 현재까지 공주 송산리 6호 벽화고분과 부여 능산리 고분 총 2기의 벽화만이 발견되었다. 7세기 중반 시작된 동아시아 질서재편 전쟁 과정에서 멸망한 후 현재까지의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유물과 유적들이 훼손되었다고는 하나 연합군과의 전쟁으로 많은 유적이 파괴되었음에도 수십 기의 고분벽화 유적을 남긴 고구려와 비교했을 때너무나도 적은 수치이다이는 앞서 이야기 하였듯이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벽화고분의 문화가 깊게 뿌리내리지 못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따라서 백제 고분벽화의 유형 및 장르별 줄기를 파악하기란 힘든 일이긴 하나 현존하는 두 기의 벽화에서도 고구려의 고분벽화와의 관련성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특히 공주 송산리 6호분은 중국 남조식 벽돌무덤으로써 사신의 위치와 형태에서는 남조양식의 수용을 보여주나화면을 사신만으로 구성한 점에서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능산리 벽화 고분에서 나타난 연꽃 그림의 표현 방식에 있어서도 6세기 고구려 평양권의 고분 벽화와의 관련성을 엿 볼 수 있다

 

  신라에서 발견된 어숙술간묘 벽화에서는 지름만 60cm의 대형 연꽃들이 백제나 고구려와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어 신라화(新羅化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그러나 주름진 넓은 치마를 걸친 두 귀부인과 바지를 입은 귀부인으로 이루어진 세 인물상은 고구려 쌍명총 벽화 중 귀부인 공양행렬을 연상시킨다. 신라의 고분벽화는 고구려와 접경지인 순흥에서 발견되어 그 주인이 신라인인지고구려인이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긴 하나 여하튼 벽화에서 고구려적 요소가 담겨있는 점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고구려 고분의 영향 하에 출현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의 장의미술은 5세기를 전후하여 기하학적인 장식문의와 다소 상징적인 표현 위주의 장식고분과 고분벽화가 많이 성행하였다. 그러나 이후 오사카나 나라지역에서 새로운 개념의 벽화고분이 등장하기 시작했고이 과정은 고구려 및 수당으로부터의 문화적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특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카마쓰총 고분 벽화의 주요 제재인 사신도는 널방 네 벽에 사신을 나누어 그리고 있으며특히 안벽에 현무만을 홀로 나타낸 점이 전형적인 고구려의 사신도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또한 백호 꼬리 쪽에 표현된 여인들에게서 고구려의 복식과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고이에 따라 고분의 주인 또는 고분을 제작한 화공이 일본으로 건너간 고구려인이 아닐까 하고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처럼 고분벽화는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뿐 아니라 일본에까지도 문화적인 영향을 주었으며이들 나라와 활발한 대외 관계를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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