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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고구려 고분벽화의 특징

by Rail-road 2024.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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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벽화의 분포

  우리 역사 속에서 고대 시대라고 하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시대를 생각하면 된다. 고대 삼국의 고분벽화는 현재까지  110기 이상이 발견되었다고 하며, 그중 백제와 신라가 각 2기, 1기는 가야의 것으로 알려졌다. 다시 말해, 나머지는 전부 고구려의 것이라는 뜻이다.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벽화들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더라도 이는 고분벽화 문화가 한반도 이남 지역으로는 뿌리 깊게 정착되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수치이다또한 고구려는 3세기 말부터 7세기 전반까지 지속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에 비해 백제와 신라가야의 벽화 고분은 6세기라는 특정 시기로 한정되어 있다. 이런 고구려의 고분 벽화도 대부분이 지금의 평안남도와 황해도 지방(평양안악), 그리고 평안북도와 압록강 일대(집안환인)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학계에서는 이를 편의상 평양권 벽화고분집안권 벽화고분으로 분류하고 있다. 집안 지역은 환인과 더불어 고구려가 건국되기 이전부터 예맥족의 정치 사회적 중심부였으며평양은 5세기 이후 고구려의 수도 기능을 했던 곳으로 고분의 분포를 통해서 이 두 곳이 고구려의 중심지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고구려의 장의미술 수용과정과 그 주체성

  중국의 장의미술은 중국이 세력 범위를 점차 넓혀가고 대외 관계의 범위를 확대해 나감에 따라 여러 동아시아 국가들에 전파되었고 고구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앞서 이야기한) 중국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화상석, 화상전은 그 제작과 기법의 전문성이나 사상적 이해관계 그리고 사회적 소요 등의 원인으로 주변 지역에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은 반면에 '동경'과 같은 껴묻거리용 장의미술은 그 제작 방법이나 비용에서도 무리가 없으며수입도 가능하여 동북아시아를 포함한 동아시아 일대 여러 나라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그러나 고분벽화는 화상석과 마찬가지로 무덤 내부 장식 및 제작 기술 등의 어려움이 있었기에 화상석만큼은 아니었으나 고구려와 같은 특정 국가동북아시아의 일부 국가 및 서역 동부를 제외하고는 널리 수용되지 못하였으며이는 곧 고대시대 고구려가 자체적으로 고분벽화를 제작유지할 수 있는 능력과 문화, 미술적 기지를 확보한 국가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예이다.

  

  고구려는 이러한 고분벽화의 수용과정에 있어서도 선택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받아들이는 그 과정에서 나름의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다제재의 선택에 있어서 고구려 문화와 맞지 않는 것들은 적극적으로 걸러내었으며똑같은 제재라 하여도 표현 기법에서 차이를 보여 벽화문화가 재해석되어 수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예를 들면 한대 화상석뿐 아니라 위, 시대의 고분벽화에서 주요 소재로 다루어졌던 '연음백회' 장면은 고구려에서 간략하게 처리되거나 생략되는 데 비해중국에서는 제한된 규모에 그치던 사냥도가 고구려에서는 중요한 제재의 하나로 묘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발견된 '수렵도'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또한 화상석의 주요 제재 가운데 하나이던 상서로운 나무의 표현 기법은 받아들여지되 그 내용은 고구려인 고유의 나무에 대한 신앙으로 재해석되고 채워졌다.

 

  이처럼 고구려는 중국에서 형성된 장의미술에 적극적으로 반응했던 국가였으나 그 수용에 있어서는 나름의 방식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만약 이와 같이 국가 간 문화적 전달 과정에 있어서 충분한 재해석 없이 그것이 수용된다면 그 나라에서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채 이내 소멸될 것이며또는 반대로 다른 문화에 의해 종래에는 국가의 정체성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이에 미루어 볼 때 고구려는 동아시아넓게는 아시아 및 서역 일부에까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중국과의 관계 속에서도 주체적인 정신과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국가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시기구분

  고분벽화뿐 아니라 모든 유적이나 유물을 이해함에 있어서 지역성과 보편성을 항상 함께 염두해두어야 하며 또한 같이 생각해야 할 것이 바로 ‘시대성’이라 할 수 있다예를 들어 해와 달은 시기와 지역에 크게 상관없이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보편적으로 표현되는 요소인가 하면생활풍속을 다룬 주제는 주로 5세기 초기까지 많이 그려지다가 그 이후로는 장식무늬나 사신도가 성행하여 거의 모습을 감추기도 한다이처럼 고구려 고분벽화는 지역별로 (집안권이냐 평양권이냐에 따라조금의 차이를 보이기는 하나 고분구조와 벽화주제를 고려하여 고분벽화 제작시기를 가늠해 보았을 때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기는 3세기말에서 5세기초에 걸치는 시기로 여러 방무덤에 생활풍속이 즐겨 그려졌던 것을 볼 수 있다. 제2기는 5세기 중엽에서 6세기초에 걸쳐 여러 방무덤과 외방무덤에 생활풍속, 장식무늬, 사신이 독자적혹은 뒤섞여 그려지는 시기이다마지막 3기의 고분벽화는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중엽까지 걸쳐지며 외방무덤에 사신이 사실상 유일한 벽화 주제로 등장한다이러한 주제의 변화는 지역에 따른 정신 및 사상의 차이이기도 하며 세월의 흐름에 따라 무덤 내부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구려가 인접한 나라의 흐름과 맥을 같이하는 보편성과 고구려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수성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체적으로 조망해 보는 것은 고분벽화의 확실한 이해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사항이기는 하나특정시기를 채택해 그 시대적 상황 속에서 동아시아라는 문화적 범주 안의 고구려가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수용하고 재해석을 이루어 냈는지 자세히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특히 제3기는 고구려에게 있어서 백제의 부흥과 신라의 성장그리고 수, 당의 통일세력 등장을 겪으면서 국제환경이 변화하던 시기이자 내부적으로도 다소 혼란의 시기였으며, 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이르는 역동의 시기이다이 시기에 새로운 계통의 종파인 도교의 유행에 따라 주된 주제로 등장한 ‘사신도(四神圖)’를 통해서 남북조당에 이르는 중국의 여러 왕조와의 교섭과 갈등 속에서 어떤 관련성을 이루며 어떻게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여졌는지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성이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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