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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역사적 사실의 객관성

by Rail-road 2024.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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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실의 객관성

  역사에서 사실 그 자체. 다시 말해 ‘객관적 사실’이란 것이 존재 하는가

  일단 객관적 사실, 그 자체는 '실재(實在)'한다. 이 부분은 크게 이견이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이성계가 조선을 세웠다’라는 객관적 사실, 그 자체는 분명 실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객관적 사실이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같은 의미로 예를 들면 ‘9.11 테러 사건’ 그 사건 자체는 분명 존재하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9.11 ‘테러’라는 용어 자체가 이미 주관적인 해석을 띠고 있어, 조금 더 객관적인 사실로 바꾸어 표현한다면 ‘2001년 9월 11일 비행기가 미국 뉴욕시에 있는 세계 무역센터 건물과 충돌했다.’라는 단순 사실(simple fact)을 도출해 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풀어 쓴 사실들이 과연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들이라 할 수 있을까?

  사실들이 실재한다는 명제에는 동의하지만 ‘역사적 사실들이 객관성을 갖는다.’ ‘역사는 사실 그 자체만을 서술할 수 있다, 또는 서술해야 한다.’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 이유를 두 가지 입장에서 설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사실의 선택에 있어서이다. 예를 들어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넜다.’라는 사실이 있다고 했을 때, 분명 루비콘강은 시저가 건너기 그전에도 그 후에도 건너는 사람이 존재했을 텐데 왜 우리는 ‘시저가 루비콘강을 건넜다’라는 사실만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다. 이처럼 역사적 사실이란 여러 단순 사실로부터 ‘의미 있는 사실’이라는 선택의 과정을 거친다. 즉 이 과정 자체가 벌써 주관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역사가들은 이러한 단순 사실들을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로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고, 그러한 의미에서 E. H. 카는 ‘역사가의 사실이라 부르는 것이 더 명료하다’ 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 사실들이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못 갖는가에 관한 역사가들의 합의를 얻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E. H 카가 예를 들어 설명한 <스탤리브리지 웨이크스의 사건역시 역사적 사실로 거듭나기 위해 그 후견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아무리 역사가에 의해서 선택된 사실이라 할지라도 하나의 사실이 '역사적 사실'로서 제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수많은 역사가로부터 ‘타당하고 의미 있다.’라고 인정받아야 하며, 이것을 바탕으로 역사가는 사실에 대한 객관적 인식과 정확하고 충실한 해석에 임해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사실의 정확성에 있어서이다. 이야기에 앞서 먼저 ‘정확성은 의무이지 미덕은 아니다.’라는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속 하우만의 논평을 인용하고 싶다. 만약 역사적 사실들이 모두 정확하게만 서술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단순 사실들의 나열, 연대기, 기록에 불과하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어디까지 진실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의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시간별로 온도를 체크해서 1시에 9도, 2시에도 9도라고 기록된 사실을 토대로 “1시에서 2시 사이에 온도 변화는 없다‘라고 서술한다면 우리는 1시 30분에 혹시 온도가 1도 올라갔을지도 모른다는 숨겨진 사실의 가능성을 놓칠 수가 있는 것이다. 즉 우리가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 중에서도 잃어버린 고리가 있을 수 있으며, 이 고리가 확인되기 전까지는 사실의 전부를 밝힐 수 없는 것이다.

 

  <슈트레제만 이야기> 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선택 과정을 시작한 것은 서튼이나 베른하르트가 아닌 슈트레제만 자신이었으며, 역사가에게서 사실이나 문서가 필수적이기는 하나 맹목적으로 그것을 숭배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사실이나 문서가 스스로 역사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며, 과학적 근거와 사건의 개연성, 정확한 사료 연구가 바탕이 된 역사가의 해석 또는 상상적 이해가 이 단순 사실 사이에 있는 고리를 찾아내고 연결해 주어 하나의 종합적인 역사적 사실이 태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이 객관성을 얻기 위해서는 역사가들은 자신이 연구하는 주제나 적용하려는 해석에 관련되는 사실들을 남김없이 그내려고 노력해야 하며 최대한 객관적이고, 최대한 정확하게 서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이러한 입장에 대해서 한 가지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15세기 이탈리아의 시대적 조류의 커다란 변화에 대해 많은 역사가가 그 중요성을 인식했고, 대부분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으며 그것을 ‘르네상스’라는 역사적 사실로 기록했다고 했을 때, 이처럼 모든 역사적 사실들이 이렇게 일치된 의견을 보이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실재로 20세기 냉전의 시기에는 많은 사실들에 대해 입장 차이가 존재했으며, 이에 서로 다른 역사적 사실들로 서술되어졌다. 또한 앞서 이야기한 <슈트레제만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가 그동안 알아왔던 사실들이 뒤집어지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즉 이것은 콜리우드 사관의 위험성을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어차피 조지 클라크 경이 말한 ‘객관적인 역사적 진리는 없다.’ 결국 이 해석이나 저 해석이나 모든 매한가지라는 회의주의에 빠지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맺음말

  역사는 과거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대상 자체가 이미 과거이기에 객관적 서술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E.H 카가 이야기 했듯 ‘산(山) 자체는 존재한다.’는 객관적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역사란 과거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변화뿐만 아니라 그 과거와 변화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까지도 역사라고 생각한다. 객관적 사실은 분명히 존재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은 대립될 수도, 알려져 있던 역사적 진실이 깨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자체가 바로 역사인 것이다. 만약 지금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이 모두 진짜라고만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하고 있는 역사 연구 중 절반 이상이 전부 쓸모없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사실과 역사가(해석)의 관계는 항상 평등하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 사실이란 역사가에 의해서 선택되어야 그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진실이 아닐 수 도 있다는 가능성을 항상 역사가에게 숙제로 주고 있는 것이다. 즉 어느 한쪽에 무게를 둘 수 없으며, 양쪽 다 평등한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E.H 카가 이야기한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 즉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 그 그중에서 특히 ‘끊임없는'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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