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한 감성을 저격하는 사랑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는 이병헌, 이은주가 주연해 2,000년도에 개봉한 김대승 감독의 작품이다. 이 영화를 보기로 결심했던 이유는 (지금이야 연기를 너무 잘하는 배우이지만) 당시 연기에 한참 물이 오르기 시작했다고 느꼈던 이병헌과 개인적으로 너무나 좋아했던 이은주라는 배우와의 시너지가 어떻게 그려질지 매우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난 후, 한참이 지나서야 이 영화가 당시 사춘기 시절이었던 내 감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의 줄거리
먼저 영화의 이야기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보면, 인우(이병헌)와 태희(이은주)가 서로 알아가고 사랑하게 되는 과정, 그리고 태희가 현빈(여현수)이라는 인물로 환생해 인우와 다시 만나게 되는 과정으로 나눌 수 있다. 감독은 인우와 태희가 서로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아기자기하면서도 현실감 있게 잘 연출해 내며, 이병헌의 어리숙해 보이는 모습과 이은주의 절제된 감정표현이 절묘한 삼박자를 이루어 낸다. 태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친구 대근(이범수)에게 담배 피우는 법 (담배 연기로 도넛까지 만든다)을 배우는 인우의 모습, 국문과인 인우에게 숟가락은 왜 '디귿' 받침인지 물어보는 태희 등 이러한 일상적인 모습들에 코믹적인 요소가 더해져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흐뭇한 미소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야기는 역시나 순탄하게 흘러가지만은 않는다. 군 입대를 앞둔 인우를 마중 나가기 위해 집을 나서던 태희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된다. 시간이 흐르고 국어 교사가 된 인우는 모든 행동이 태희와 똑같은 제자 현빈을 만난다. 태희가 살아있었을 때 했던 행동, 질문, 즐겨 부르던 음악, 사소한 습관까지 닮은 현빈을 보고 인우는 현빈이 태희의 환생임을 확신하고, 현빈에게 '나는 이렇게 너가 보이는데, 넌 왜 날 못 알아보냐'라고 흐느낀다. 결국 제자인 현빈 또한 자신이 태희의 환생임을 깨닫고 인우에게 달려가 기차역에서 만나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이 장면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이자 감독의 표현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감독은 '환생'으로 다시 이루어진 사랑에 그치지 않고, 또 하나의 장치를 둔다. 그건 바로 제자 현빈이 '남자'인 것이다. 따라서 이 둘의 사랑은 또 한번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인우와 태희는 '다시 만나 사랑하겠다'라고 약속하며 줄을 묶지 않은 채 같이 번지점프를 한다. 사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 주의 깊게 보지 않아서 줄을 묶지 않고 뛰어내렸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응? 이게 끝인가? 갑자기 번지점프를 왜 하지? 억지로 제목이랑 껴맞추려 하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를 두 번째로 봤을 때, 둘이 번지점프를 하자 사람들이 황급히 소리 지르며 뛰어가는 걸 보고 그제야 '아, 줄을 묶지 않았구나'를 깨달았다. '번지점프를 하다'라는 제목이 주는 상징성을 그제야 눈치챘다.
2000년도 초반까지만 해도 동성애는 상당히 터부시되던 시대였다. 실재로 영화가 개봉했던 당시 동성애적인 코드가 제법 이슈화되어, 그 당시 영화가 비교적 저평가된 부분이 있었고 이 때문에 흥행면에서는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었다. 어떻게 보면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가 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감독의 의도를 잘 읽어내지 못했었던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태희는 단지 남자로 태었났을 뿐, 현빈은 인우가 사랑하는 태희 그 자체였었다. 어쩌면 그런 사랑이 현실에서는 인정되지 않음을 그 둘의 자살로 보여줌으로써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그려냈는지도 모른다.
이 영화를 보고나서 거창하게 '사랑이란 게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는 느낄 수 있다. 오랜만에 사랑이란 감수성을 느끼고 싶다면, 또 숟가락이 왜 '디귿' 받침인지 궁금한다면, 이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를 추천한다.
[추신]
영화의 엔딩 부분이 너무 좋다. 가끔 일부러 그 장면만 돌려놓고 보기도 한다. 인우와 현빈이 번지점프를 하고, 뒷 배경으로 카메라가 넘어가며, 양옆이 산으로 둘러싸인 강줄기를 끝없이 따라간다. 그리고 인우의 내레이션이 들린 후 (이병헌의 목소리가 너무 좋다.) '오, 그대는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OST가 흐른다. 꼭 이 장면을 끝까지 보기를 추천한다.
"다시 만나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극 중 이병헌의 마지막 나래이션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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