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류의 사랑 이야기
파이란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은 20년이 더 지난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요즘 시대야 콘텐츠의 '다양성(多樣性)'이라는 말을 굳이 꺼내지 않아도 영화의 소재, 주제, 장르, 캐릭터 등이 너무나 다양하고, 또 어떠한 이야기는 다양함을 넘어 너무 난해해서 때로는 이해가 안 되거나 혹은 눈살이 찌푸려지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러나 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적어도 내가 봐왔던 영화 기준에서는 영화의 소재는 주류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었고 그런 천편일률적 이야기 홍수 속에서 파이란은 당시 꽤 신선하고 (좋은 의미로)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혹시나 누군가 이 글을 보고 지금 파이란을 본다면 어쩌면 '응? 이 정도 가지고?'라는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조금 뻔해 보일 수 있는 스토리이긴 하지만 20년 전의 나에게 있어서 파이란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미를 갖는 영화였다.
첫째, 파이란은 비주류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건달이긴 하지만 소위 말해 '삼류'다. 이 표현은 영화의 캐치 프레이즈(Catch phrase)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세상은 날 삼류라 하고, 이 여자는 날 사랑이라 한다' 주인공 강재(최민식 분)는 비디오 가게에서 불법 성인물을 팔다가 잡혀들어간다. 이후 비디오 가게마저 후배에게 내주게 된 강재는 건달 시작을 같이 시작한 동기 용식(손병호 분) 밑에서 굽실거리며 일하면서 후배들에게는 무시 당하고, 오락실을 전전하면서 주인을 협박해 돈 몇 푼 뜯어내는 정말 삼류 깡패다. 이렇듯 아무것도 보잘것없는 이 비주류의 삶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것이 제법 흥미롭다. 거듭 말하지만 현재 관점에서 보면 그냥 흔한 이야기 소재일 수 있다. 그러나 파이란 개봉 3년 전 당시 꽤 흥행했던 박신양, 전도연 주연의 '약속(1998 作)'이라는 영화와 또는 파이란과 같은 해의 개봉한 '친구(2001 作)', '두사부일체(2001 作)' 등 다른 건달 소재의 영화들을 보면 같은 소재 안에서도 당시로서는 파이란이 '신선했다'라는 표현이 이해 될 수 있을 것이다. 꼭 주류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그래도 일반 소시민(?) 정도까지는 이야기 소재로 많이 다뤄지긴 했는데, 우리가 선망하거나 혹은 자극적인, 또는 쉽게 공감이 가능한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일반적인 그 당시에 파이란은 과감하게 '삼류'를 이야기한다.
역사학에서도 역사 연구의 대상과 서술 범위에 따라 크게 '거시사'와 '미시사'로 나눌 수 있는데, 역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내가 <마르탱 게르의 귀항>, <고양이 대학살> (프랑스사에서 대표적인 미시사, 생활사 연구서)에 심취했던 것처럼 어떻게 보면 소집단, 또는 한 개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미시사의 연구 방법론을 따르는 파이란의 영화적 요소가 어쩌면 내게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삼류를 '사랑'이라 부르는 하얀 난초
둘째, 파이란은 대화 한번 못해본 남녀의 사랑 이야기이다. 파이란은 영화 장르 상 분명하게 멜로/로맨스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극 중 주인공인 남녀, 즉 강재와 파이란(장백지 분)은 대화 한번 나눠보지 못한다. 이 영화의 제목이자 여자 주인공인 파이란은 한문으로 '백란(白蘭)' 즉, 하얀 난초라는 뜻이다. 이름만큼이나 순백의 마음을 가진 파이란은 중국인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한국에 있는 이모를 찾아가라는 이야기를 듣고 무일푼 단신으로 한국을 찾는다. 그러나 이모도 어디론가 이민을 떠난 후여서 더 이상 소식을 찾을 수 없게 되고, 오갈 곳 없이 불법 체류자로 남게 될 파이란은 결국 한국에 계속 체류하기 위해 '위장 결혼'이라는 방법을 택한다.
이 위장 결혼을 해주었던 것이 바로 강재이다. 강재는 큰 의미도 없이 돈 몇 푼 벌어볼 알량한 목적으로 일면식도 없는 여자와 서류상 결혼에 응해준다. 서로의 목적이어야 어찌됬든 파이란은 그래도 한국에 계속 있을 수 있게 된 것에 고마움을 느끼며, 감사의 말이라도 전할 마음으로 강재를 찾아가는데 때마침 강재는 불법 성인물 유통으로 경찰들에게 연행되는 타이밍이었고, 이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둘은 스치듯 서로를 지나친다.
세상은 날 '삼류'라 하고, 이 여자는 날 '사랑'이라 한다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정확히 모든 워딩을 기억할 정도로 잘 표현한 이 카피라이트가 결국 영화의 내용과 결말, 모든 걸 내포한다. 강재는 조직의 보스 격인 용식과 술을 마시던 중, 용식이 반대편 조직원을 살해하는 현장에 같이 있게 되고 용식 대신 감옥에 들어가는 걸로 약속한다. 배 한척 살 돈을 주는 조건으로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반협박식의 약속이었다. 드디어 경찰이 찾아오고, 모든 걸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강재는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된다.
이강재 씨 맞죠? 장백란 씨가 부인 맞으시죠? 안 됐지만 어제 사망했습니다.
이때부터 영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강재는 백란의 흔적을 찾아가고 그때부터 자츰 마음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백란의 시신을 마주한 그때부터 강재는 알수없는 회한을 느끼고, 특히 백란이 남긴 편지를 읽으며 강재 자신도 놀랄 정도의 오열을 쏟아내는 부둣가 씬은 바보처럼 살아온 자신에 대한 원망과 타국에서 온 이름도 처음 들어본 여자가 '삼류' 인생의 자신을 사랑해 주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고마움, 후회, 강재가 가지고 있는 그 모든 한(恨)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2001년 작품인 파이란은 개성 있는 캐릭터들과 특별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색깔 있는 영화였고, 이 부분이 이 영화를 조금 더 특별하다고 느끼는 세 번째 이유이다. 특히 지금은 이미 많이 유명한 손병호 배우, 공형진 배우도 어떻게 보면 이때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손병호 게임'으로도 매우 친숙한 배우이긴 하지만, 극 중 표독하고 야비한 조직 보스의 모습에 '어디서 저런 사람을 캐스팅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공형진 배우의 경우, 당시에도 이미 스타급이었던 최민식 배우로부터 거의 마지막 촬영쯤에, "지금부터 이 영화를 시작했으면 너의 캐릭터와 이 영화가 더 좋은 작품이 됬을 것 같다"라는 말을 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만큼 공형진 배우도 연기력이 많이 무르익지 못했던 신인 시절이었지만, 관객들이 느끼는 캐릭터는 분명했을 거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센세이션 했던 건 장백지 배우의 캐스팅이었다. 조금 시들어지는 시점이긴 했지만, 그래도 90년대까지만 해도 중화권 배우들의 영향력은 엄청났기에 (그것도 여배우의 캐스팅이라니)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신선했던 조합이었다.
강재씨, 내가 죽으면 만나러 와 주실래요? 만약 만난다면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당신의 아내로 죽는다는 것 괜찮습니까? 응석 부려서 죄송합니다.
마지막이라는 백란의 부탁에 강재는 어떻게 답을 했을까. 이후 강재는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다소 비극적인 결말에 더욱 아련함과 여운이 넘는 영화, 파이란(Failan)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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