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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아라한 장풍대작전, 통쾌한 현대판 무협 액션

by Rail-road 2021.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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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한 장풍대작전 (류승완 감독, 2004년)

유쾌하고 통쾌한 무협 액션

  '아라한 장풍대작전'(이하 아라한)은 2004년 개봉한 류승완 감독의 작품이다. 개인적인 사족을 덧붙이면 2004년은 잠깐의 방황을 하다 어렵게 마음을 고쳐 먹고 다시 수능 준비를 하던 시기였다. 안하던 공부를 약 1년 반만에 시작하면서 '뒤늦게 이렇게 하는게 맞나'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되물을 정도로 확신도 없었고(각오도 없었다), 마냥 답답하기만 해서 많이 불안해하던 시기였는데 그 때 이 영화를 만났다. 

 

  그 날도 어김없이 학원 수업을 듣고자 1호선 바깥 풍경을 구경하며 전동 열차에 몸을 기대던 중에, 뭔가에 홀리듯 갑자기 극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별안간 극장 한 구석에 앉아 영화가 나오기만 기다리던 나는 너무도 유쾌한 이야기와 통쾌한 무협 액션에 매료되어 영화가 끝나고도 한동안 그 감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기억에 남는 영화들은 그 시기에 내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상황과 정서가 영화와 적합하게 맞닿아 있거나 또는 그 영화로 인해서 어떤 감정이 해소가 될 때 기억에 오래 남는 것 같다. 아라한은 후자의 케이스로 영화가 갖고 있던 통쾌하고 후련한 이야기가 한동안 내게 예상치 못한 에너지를 주었고, 답답하고 불안했던 그 시기를 잘 넘기게 해준 고마운 영화였다

 

찌질한 열혈 순경의 세상 구하기

  아라한의 줄거리는 아주 단순하다. 찌질하지만 정의감은 넘치는 순경 상환(류승범 분)은 어느 날 소매치기범을 쫓다가 의진(윤소이 분)을 만난다. 의진이 쏜 장풍에 의도치 않게 상환이 맞고 기절하자 의진은 상환을 칠선들에게 데리고 가는데, 치료차 침을 맞게 된 상환을 보며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자운(안성기 분, 칠선 중 한 명이자 의진의 아버지)은 상환에게 도를 닦고 수련을 하여 '마루치'가 될 것을 제안한다. ('마루치'는 영화에서 '아라치'라는 용어와 함께, 수련을 열심히 해서 어느정도 경지에 오른 선인들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여담으로 마루치 아라치는 1970년대 애니메이션,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에서 따왔다고 한다.)

 

  무협지 영화같은 말을 믿지 못했던 상환은 이를 의심하면서도 몸에서 맴도는 이상한 기운을 느끼기 시작한다. 어느날 어김없이 열혈 순경으로 순찰을 하던 중 지역 건달들에게 호되게 당하게 되고, 경찰로서 많은 상실감을 느끼게 되자 다시 칠선들을 찾아가 수련을 하기로 결심한다. 처음엔 그냥 장풍이나 배워 못된 놈들을 혼내줄 마음으로 찾아간 그였지만, 칠선 중 한 명인 흑운(정두홍 분)에게 차례로 당하는 다른 칠선들을 보며 그와 맞서기로 결심하고 세상을 구한다

 

  뻔한 이야기이지만 이 영화의 재미는 이런 무협지 같은 이야기를 현대 공간으로 끌고 왔다는 점에 있다. 숲에서 나무를 타고 등장할 법한 사람들이 건물을 나무 삼아 빌딩 숲을 날라다니는 모습이라던지, 돈을 벌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현대에 적응하는 칠선들(한의원을 하는 자운, 점집을 운영하는 반가야인, TV출현하여 망신만 당하고 돌아오는 설운과 육봉), 특정 분야의 경지에 이른 달인들(어마어마한 크기의 봇짐을 머리 위에 이고가는 할머니, 몇 십켤레의 구두를 양손에 쥐고 가는 구두닦기, 혼자서 냉장고를 등에 메고 가는 이삿짐 직원 등)을 득도에 이른 사람이라고 표현한 부분, 이런 이색적인 설정들은 이야기를 더 풍부하고 매력있게 만드는 부분이다.

 

 

극을 끌고가는 배우 류승범의 힘

  말은 이렇게 하지만 아라한은 영화의 완성도 면에서 전반적으로 부족함이 많은 영화다. 지금에 와서보니 액션도 약간 촌스럽다고 해야할까. 넘어지거나 때릴 때 불필요하게 회전을 많이 하기도 하고 (당시 전반적인 한국 영화 액션 트렌드가 약간 그랬던 시기이기도 했다) 대사도 조금 유치해서 못 들어줄 정도라고 느껴지는 부분들이 많았다. 특히 당시 신인이었던 윤소이 배우의(아마 영화로는 아라한이 첫 작품으로 알고 있다) 너무 힘들어가 있는 듯한 연기 톤이 극의 집중력을 떨어뜨리기도 했고, 부자연스런 CG도 한 몫 했다. 상환이 각성하여 흑은에게 이른 바 '유경음강'을 펼칠 때, 어색한 CG 때문인지 관객 중 많은 사람들이 유치하다는 듯 '하하하' 거리며 비웃었던 반응도 기억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극을 끌고가는 류승범 배우의 힘만으로 매력적이기에 충분하다. 류승완 감독이 어색한 CG 기술이나 다소 유치해보이는 대사들을 끌고 감에 있어 어떤 부분을 염두했는지는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 어색한 CG와 대사를 류승범 배우가 갖고 있는 특유의 B급 감성으로 인물을 표현하며 극 전반을 소위 말해 '멱살잡고' 끌고 간다. (개인적인 생각에 류승완 감독이 기술적으로 한계가 있는 CG 때문이라도, 오히려 적절한 유머 코드가 섞인 B급 정서로 가보자는 주문이 있었을 것 같다)

 

  류승범의 연기는 가히 생활 연기라고 느껴질 정도로 우리가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분노, 짜증, 찌질, 어색 등 여러 감정들을 가벼우면서도 매우 섬세하게 표현해낸다. 장풍을 배워보려 찾아왔다가 몰래 요쿠르트를 하나 까먹고, 그 마저 의진에게 걸려 변명을 늘어놓을 때의 대사는 그게 정말 대본에 다 있는 내용인지 확인하고 싶어질 정도로 자연스럽다. 무엇보다 본인을 괴롭혔던 건달들에게 복수하는 신에서는 보는 이가 다 호쾌하고, 후련할 정도의 쾌감, 카타르시스 마저 느껴질 정도이다. 이는 류승범이라는 배우가 관객들로 하여금 그 캐릭터에 얼마나 몰입하게 했는지를 알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한 배우가 이렇게나 극을 하드캐리하는 영화는 많지 않다. 그 점에서 영화 속 류승범의 매력은 대단하다.

 

보통 사람의 특별한 이야기

  누구나 한번쯤은 그런 재밌는 상상을 해볼 것이다. 일에 치여, 사람에 치여, 학생들은 공부에 치여 현실에서 보통 사람처럼 살아가지만 어떤 계기로 일상에서 벗어나 영웅처럼 특별한 삶을 살게 되는 또는 세상을 구하는 상상을. 원초적이고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그런 이야기는 언제나 사람의 흥미를 끌고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아라한 장풍대작전이 내게 그런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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